피오트르 오스타셰프스키 대사의 폴란드 계엄령 선포일을 기리는 글(12월 13일)
13.12.2022
주한 폴란드 대사관은 폴란드 계엄령 선포일(1981년 12월 13일)과 관련하여 피오트르 오스타셰프스키 주한 폴란드 대사의 본문을 열람하도록 초청합니다.
운명의 1981년 12월 13일
1981년 12월 13일, 폴란드의 군사독재 공산주의 정부는 국가 전체에 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소위 <연대 축제(Solidarity Festival)>는 잔혹하게 막을 내렸고, 폴란드 국민들은 새로운 현실에 눈떠야 했습니다.
폴란드는 언제나 독특한 나라였는데, 심지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러시아/소련에 점령당했을 때조차, 불라트 오쿠자바(Bulat Okudzhava)의 말을 빌리자면, 언제나 ‘소련 통틀어 가장 웃긴 동네’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스탈린 동지는 폴란드에 공산주의 시스템을 강제하는 일이 ‘소 위에 안장을 얹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폴란드와 공산주의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스탈린은 그 둘의 조합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입증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폴란드는 수차례 저항했는데, 공산주의 위성국가 전체를 통틀어 봉기가 가장 자주 일어났습니다. 1956년, 1968년, 1970년, 1976년, 그리고 마지막으로 솔리다르노시치(Solidarność, 연대)라고 알려진 대규모 사회 운동이 일어난1980년만 언급하기로 합시다. 노동계급의 대표라는 자리를 갈취한 공산주의 정권에 의해 잔인하게 제압된 이전의 시위들과 달리, 1980년 여름엔 폴란드 전역, 특히 폴란드 북부, 그단스크, 그디니야, 슈체친, 그리고 남부의 야스트솅비에에서 파업이 일어났습니다. 그단스크가 가장 결정적이었습니다. 그단스크엔 특별 파업 위원회가 세워졌고, 지식인들 사이에서 즉각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전쟁 이후 처음으로 폴란드의 독립적인 노동조합 및 사회 운동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며, 민주적 변화로 가는 길을 닦았습니다. 공산주의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었습니다. 공산주의 체제는 커다란 거짓말과 반역에 기반하고 있었고, 그 손에 묻은 피는 공산주의 정권을 한 번도 받아들인 적 없는 폴란드와 권력을 나눠야 했습니다.
1980년 9월에서 1981년 12월 사이에 폴란드는 탄탄한 것으로 보였던 증오 받는 체제의 기반을 뒤흔들면서, 전세계 신문의 일면을 차지했습니다. 노동 계급이 어떻게 해서 자유롭고 독립적인 노동조합 솔리다르노시치와 어떻게 단결할 수 있었을까요? 공산당원은 200만명이 안 되었던 반면, 솔리다르노시치에는 1000만 명의 회원이 모였습니다. 이 수치가 이미 말을 다 했습니다. 친러시아 공산주의 정부에 도전장을 내미는 일은 소련에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는데, 특히 1981년 여름에 솔리다르노시치가 중앙 유럽의 모든 소련 위성국가들에게 자신의 발자취를 따라 자체적인 운동을 형성하라고 독려한 일은 더욱 그러했습니다. 힘겨운 일상 속에서도 폴란드는 민주주의와 자신만의 삶을 꾸려 나갈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솔리다르노시치는 노동 계급의 통치와, 공산주의 국가가 사회 정의, 평등, 정당한 부의 분배를 실현한다는 공산주의 프로파간다 전체를 파괴했습니다. 실재와 프로파간다 간의 간극은 폴란드에서만 볼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전세계적인 것이었습니다. 한편 폴란드 내에 30만명이 넘는 소련 군인들이 영구 주둔하고 있었지만, 소련이 폴란드를 무력으로 잠재울 가능성은 낮았습니다.
당이 솔리다르노시치 제압을 위한 준비를 했습니다. 1981년 2월 당시 폴란드 국방부장관이던 보이체흐 야루젤스키는 수상 자리를 맡게 되었고, 곧이어 폴란드 통일 노동자당 제1서기장이 되었으며, 그리고는 국무회의장, 국가방위위원회장을 맡았습니다.
1981년 12월 13일, 폴란드는 완전히 새로운 상황에 눈뜨게 되었습니다. 군사독재 정부가 구국군사평의회라는 이름 아래 권력을 잡고 폴란드 전체에 계엄령을 선포한 것입니다. TV에서는 국가를 구하기 위해서 취해야 하는 혹독한 수단을 정당화하는 야루젤스키 장군의 연설만 방송되었습니다. 모든 전화, 항공편, 철도편 및 기타 모든 통신 및 연결 수단이 끊겼습니다. 여러 민주주의 활동가들이 특수 격리소에 투옥되었고, 앞으로 수년 간 모든 것이 끝난 것으로 보였습니다. 물론 계엄령은 아무런 문제도 해결하지 않았습니다. 경제적 문제든 사회적 문제든 말입니다. 계엄령은 폴란드를 더욱 깊은 침체에 빠뜨렸고, 공산주의 체제가 노쇠했으며 모든 활력을 잃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계엄령은 삶의 모든 측면에서 이미 존재하던 비효율과 부패를 확장한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 체제가 폴란드 뿐만이 아니라 소련 블록 전체에서 붕괴되는 데에는 8년이나 더 걸렸습니다. 폴란드는 예속된 국가들에게 자극을 주었고, 민주주의적 힘에 대한 희망이었으며, 비인간적인 체제에 대한 사회적 저항의 상징이었습니다.
오늘 12월 13일, 우리는 이 사건의 41번째 기념일을 맞았습니다. 이미 두 세대가 지났고 이 사건은 머나먼 과거의 일로 보입니다. 하지만 폴란드에게 예속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기 위해 이 사건은 언제나 기억되어야 할 것입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며 국제적 고난과 전쟁이 다시 한번 폴란드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이룬 성과를 자랑스럽게 여겨야 합니다. 폴란드는 강하고, 혁신적이며, 자립적인 모습을 보여왔을 뿐만 아니라, 국제 민주주의 사회의 일원입니다. 1981년 12월 13일의 사건은 폴란드가 자신만의 삶을 이끌지 못하도록 하려는, 이러한 흐름을 뒤집으려는 실패한 시도였습니다. 이 사건은 공산주의의 실패였고, 또 그렇게 기억되어야 합니다.
대한민국 주재 폴란드 대사
피오트르 오스타셰프스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