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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12월 13일 기념일 관련 피오트르 오스타셰프스키 Piotr Ostaszewski 대사의 글

13.12.2023

피오트르 오스타셰프스키(Piotr Ostaszewski) 대사의 폴란드 1981년 12월 13일 기념일의 중요성에 대한 글을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Piotr Ostaszewski

12월은 크리스마스와 다가오는 새해를 기다리며 일년 중 가장 즐겁게 보내는 달이지만, 12월 13일과 17일이라는 이 특별한 날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두 날은 폴란드 역사에서 중요한 날이지만, 그다지 즐거운 날은 아닙니다. 여러분께 두 날의 중요성을 상기해드리고자 합니다.

1970년 12월 14-17일. 크리스마스를 불과 며칠 앞두고 폴란드 공산당 정부는 일상 용품, 특히 식품 가격의 급격한 인상을 발표했습니다. 제2차 대전이 끝나고 2년 반이 지난 당시 시기는 공산주의 체제로 인해 생활 수준은 말할 필요도 없이 낮았고, 미래에 대한 전망도 없었습니다.

국유제와 중앙 정책에 기초한 비이성적인 공산주의 경제는 만성적인 비효율성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를 직면한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Władysław Gomułka) 공산주의 정부는 공산주의 정부가 늘 말하는 것처럼, 정부 예산을 합리화했습니다. 그래서 식량 가격을 올리기로 결정했고, 동시에 노동 계급을 만족시키기 위해 기관차나 선로의 가격을 인하할 것이라고 통보했습니다.

이러한 결정은 폴란드 노동자들에게는 너무나 과했습니다. 그단스크, 그디니아, 엘블라그, 슈체친의 노동자들은 파업에 돌입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공산주의 정부가 파업을 금지하고 심각한 범죄 및 체제 전복 활동으로 여기면서 당국에서 무력으로 시위를 진압하기로 결정했다는 점입니다.

수십 명의 사망자, 수백 명의 부상자, 수천 명이 구금자가 발생했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노동에 대한 존엄성과 존중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주도한 반정부 시위의 결과였습니다. 하지만, 시위를 통해 진정한 위기 상황이 증명되었고, 이어서 정권이 교체되었습니다.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가 물러나고 에드워드 기렉(Edward Gierek)이 러시아 정부의 승인과 함께 공산당 제1서기를 맡게 되었습니다. 

신임 제1서기는 완전히 새로운 생활 수준을 제시했습니다. 중앙 정책 경제를 근대화하기위해 서구의 신용을 받는 – ‘신용에 의한 생활’을 제시했습니다. 공산주의 경제는 정말 완고한 방식의 경제였기 때문에, 경제 개념들은 모두 몇 년 후 실패로 판명되었고 동일한 시나리오가 등장 했습니다. 만성적인 비효율성으로 인해 정부는 1976년 6월, 비합리적인 예산을 합리화하기 위해 식량 가격을 인상했고, 이어서 사람들은 파업을 했습니다. 또다시 경찰과 무장 병력에 의해 파업을 진압했는데, 이번에는 노동자들을 향해 총을 쏘지 않고 구타를 가했습니다. 노동자들은 그때부터 조직을 결성하기 시작했습니다. 노동자 방어위원회(KOR) 또는 인권 및 시민 권리 위원회(ROPCIO), 그리고 지방에서 결성한 자유 노조 분자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

1980년 8월은 폴란드 역사상 가장 기념비적인 전환의 시기였습니다. 폴란드를 강타한 파업은 폴란드 전역으로 퍼졌습니다. 그단스크 조선소에서 결성하고, 레흐 바웬사(Lech Wałęsa)를 위원장으로 둔 연대 운동(실제로는 노동조합)은 저항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공산주의 정권은 연대 노조를 인정하고 이를 합법화했야 했습니다. 공산주의 진영에서 최초로 자치 노동조합(실제로는 야당, 반대세력)이 합법화되었습니다. 폴란드는 전체주의 체제에 맞서는 평화적 저항 운동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소위 '연대 카니발(Solidarity Carnival)'은 16개월 넘게 지속되었고, 마침내 마지막 날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1981년 12월 13일,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Wojciech Jaruzelski) 장군이 이끄는 군부는 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혁명적 변화를 어떻게 평가하든지 간에, 연대 운동에 의해 촉발된 혁명적 변화들은 돌이킬 수 없다고 봅니다. 초반에는 다시 한 번 폭력을 휘두르는 전체주의 정권이 승리할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폴란드 혁명이 공산주의 체제의 기초를 영원히 뒤흔들었음이 증명되었고, 주목할 만한 사실은 폴란드뿐만 아니라 중부 유럽 전역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입니다.

폴란드는 전체주의 정권이 제정한 계엄령이 어떻게 정권의 자멸이라는 결과를 초래했는 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러나 1981년 폴란드의 크리스마스는 즐거운 날이 아니었습니다. 누구도 체제의 진정한 자멸을 알지 못했으니까요. 원탁 회의가 시작되고 타협안이 도출되기까지 8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습니다. 1981년 12월 13일의 악몽은 1989년 민주주의와 수요와 공급의 원칙을 따르는 경제로 전환하면서 끝이 났습니다. 폴란드에서는 공산주의를 상기시키는 것이 전혀 인기가 없습니다. 폴란드는 리벤트로프-몰로토프(Ribbentrop and Molotov) 조약의 희생자였고 그 후 소련에 의해 체제를 강요 받았기 때문입니다. 1989년, 폴란드는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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