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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5일 – 한국과 폴란드

15.08.2020

국가마다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날짜가 있다. 신기하게도 8월 15일은 폴란드와 한국 모두에 특별히 중요한 날이다. 양국 모두 독립을 기념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Wymarsz oddziału piechoty na front, Warszawa, sierpień 1920 r.

출처: Archiwum Akt Nowych w Warszawie 

8월 15일 – 한국과 폴란드
국가마다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날짜가 있다. 신기하게도 8월 15일은 폴란드와 한국 모두에 특별히 중요한 날이다. 양국 모두 독립을 기념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1945년 이날 한국의 꿈이 현실로 이루어졌다. 독립에 대한 긴 염원이 이루어졌다. 광복절은 한국의 긴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이다. 하지만 그 과정은 한국에게 있어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분단과 한국 전쟁이라는 역경의 흔적이 남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튼튼한 기반 위에 독립을 구축했다. 1945년 8월 15일은 한국의 국가 의식이 살아남았고 심지어 더 강해졌다는 것을 증명했다. 현대의 한국이 그 멋진 예가 되어준다. 한국에게 축하의 인사를 보낸다!
폴란드에 있어서도 1920년 8월 15일은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날 중 하나이다. 독립 회복은 1918-1921 사이에 걸친 긴 여정이었다. 한국처럼 폴란드도 세계 자주독립 국가들 사이에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싸워야 했다. 1920년 8월 15일 폴란드는 볼셰비키의 침략을 당한다. 볼셰비키는 자신들이 서양으로 확장될 미래적인 경향을 대표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글로벌 혁명은 새로운 다국적 제국의 건설을 내용으로 했다. 그런데 폴란드가 그 길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1920년 8월 15일 폴란드는 자국의 독립을 짓밟을 준비가 되어 있던 볼셰비키에 맞서 바르샤바 전장에서 독립을 지켜냈다. 이것이 1920년 8월 15일 바르샤바 전투로 불리는 사건이다. 18세기에 에드거 빈센트 대버논 경은 이 전투를 세계 역사에서 가장 잔인한 전투로 불렀다. 시련은 폴란드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진정한 독립은 겨우 20년간 지속되었다. 1939년 폴란드의 실존이 시험에 들었다. 1945년에 출범한 반 독립적인 폴란드 국가는 중부 유럽 소비에트 블록의 일부였고 소비에트 연방의 위성국가가 되었다. 완전한 독립을 최종적으로 봉하는 것은 1989년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0년 8월 15일은 폴란드가 독립이 얼마나 소중한지 항상 인식하고 있었다는 잘 보여주는 근거이다. 축하한다, 폴란드!


볼셰비키 혁명-폴란드를 위한 관점
볼셰비키가 갖고 있던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한 깊은 확신은 (물론 당시에는 그저 유럽 내를 의미했던) 세계 모든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노조와 현대 세계의 선봉 주자인 소비에트 리더십에 기반한 글로벌 사상이었다. 한편 볼셰비키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계급 투쟁으로 인식했고 국가의 개념은 거의 무시되거나 뒷무대로 밀려난 한편 폴란드에 독립은 국가 정체성의 구심점이었다. 사상적인 관점에서 폴란드는 혁명적인 접근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전략적 관점에서 폴란드는 17세기 후반부터 자국이 동쪽과 서쪽을 잇는 건널목에 있었고 국가 지위가 약하면 국가가 세력에 조종당하는 객체로 전락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있었다.
1919년 베르사유 회의와 베르사유 조약으로 유럽의 새로운 지정학적 상황이 법적으로 인정되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중유럽이나 동유럽보다는 서유럽을 다루었다. 이 시기는 사실이 곧 현실을 만드는 때였다. 군주제가 붕괴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합스부르크 제국은 무너지고 그 뒤를 이은 독일 제국은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교체되었다. 반면 러시아 전제군주정은 혁명과 끔찍한 내전으로 뒤덮였다. 레닌의 통치 아래 러시아 전제 군주 왕조는 처형당했고 새 볼셰비키 정권이 출범했다. 공산주의는 독일에서 확장되는 것처럼 보였으며 볼셰비키에 따르면 폴란드를 통과해 서쪽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손을 잡기에 충분할 정도였다. ‘베르사유 조약이 낳은 일그러진 자식’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소비에트 외교부 장관(1939)이 남긴 말로 폴란드 독립에 대한 진짜 속마음을 충분히 묘사해준다. 
하지만 1919년 볼셰비키는 서쪽으로 진출하는 것보다 전제 군주제 장군들(백군)과 싸우며 반혁명을 박살 내는 데에 더 열심이었다. 폴란드와 볼셰비키 군대 사이의 첫 전투는 1919년 늦은 겨울에 벌어졌다. 하지만 중요한 해가 된 것은 1920년이었다. 폴란드는 공격 작전에 실패했고 전세는 볼셰비키로 옮겨갔다. 그렇게 되자 폴란드의 핵심 이익에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대체 역사란 존재하지 않지만 만약의 경우에 대한 토론도 전문적 접근법의 하나이다. 


비스와 강의 기적, 1920년 8월 15일
모든 기적의 뒤에는 항상 사람들이 있다고 말한다. 바르샤바 전투에는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국가 원수,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 장군, 타데우시 로즈바도프스키 장군 등 너무나도 뛰어난 인물들이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그날의 성공에 얀 코발레프스키, 바츠와프 시에르핀스키, 얀 마주르키에비치와 같은 폴란드 암호 해독가들이 많은 기여를 했음을 안다. 볼셰비키의 암호화된 명령을 해독했기에 피우수트스키 국가 원수 폴란드 사령관이 반격을 준비하고 볼셰비키를 후퇴하게 만들 수 있었다. 폴란드는 자국의 독립을 지켜냈지만, 그와 동시에 폴란드는 볼셰비키의 길을 막은 방어벽이었기 때문에 유럽 전체를 지켜낸 셈이다. 만약 폴란드가 실패했다면 폴란드는 차기 볼셰비키 공화국으로 바뀌었을 것이고 여러 국가가 그와 같은 운명을 맞게 되었을 것이다. 대버논 경에 따르면 1920년 8월 15일 폴란드의 승리는 기원전 5세기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 비유할 수 있다. 


한강의 기적
비록 한국의 기적은 다른 차원의 사건이었지만 우리 모두 기억해야 할 사실은 이것이다. 한강의 기적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과 뛰어난 관리 능력과 이성적인 계획이 가꾸어낸 결과라는 것이다. 한국의 기적은 1945년 이후로 길고도 힘겨운 나날이 이루어낸 수확이다. 
8월 15일 이 특별한 날에 한국과 폴란드는 서로를 축하하고 양국의 긴밀한 동반자 관계에 기뻐할 수 있겠다. 

피오트르 오스타셰프스키
주한폴란드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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