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무장하라!
프랑스 주재 시코르스키 장군 망명 정부의 주요 과제 중 하나는 폴란드군을 창설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한 활동에서 폴란드 외교부, 대사관, 영사관은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폴란드 당국은 부대에 동원할 수 있는 인력을 약 16만 5천 명에서 18만 5천 명으로 내다보았다. 가장 먼저 집계된 것은 프랑스에 망명한 약 5천 명의 폴란드인들이었다. 모병 과정은 중앙 모병 사무소장을 맡았던 릴 총영사 알렉산데르 카바우코프스키가 감독하였다. 1940년 6월까지 12만 4천 명의 남자들이 모병 위원회 앞에 섰다. 이 중 10만 3천 명이 무기 소기가 가능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프랑스가 무너지고 폴란드 망명 정부가 런던으로 옮겨간 뒤에도 모병은 이어졌다. 폴란드 정부는 새로운 모병 가능성을 고려하면서 미국 행정부 및 캐나다 당국과 대화를 가졌다. 그렇지만 모병은 여전히 영국에 망명한 폴란드인들과 훨씬 작은 규모의 남아메리카 자원군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폴란드 공화국 총영사 카롤 포즈난스키는 주영국 폴란드대사관 본부에서 활동했던 영사 모병 위원회의 수장을 맡았다. 위원회는 전쟁 동안 폴란드 시민과 외국인을 포함하여 4만 5천 명 이상의 지원 자격을 심사했다. 개중에는 자원 여성 군대에 지원한 761명의 여성도 포함하고 있었다.
1939년 10월 런던에서 영사 모병 위원회 사무실; 오른쪽에서 첫 번째-스테판 도브로볼스키 소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