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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저 무어하우스: 이 전쟁은 정직하게 설명된 적이 없다

28.09.2021

폴란드에게 주변국과의 관계는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습니다. 동쪽에는 과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공격적인 러시아가 있으며 서쪽에는 과거를 완전히 잊고 싶어하는 EU 국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 로저 무어하우스

Roger Moorhouse

유럽 전쟁의 시작은 보통 9월 1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물론 어떤 현학자는 영국과 프랑스가 9월 3일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고, 따라서 독일과 폴란드의 전쟁이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었다는 점을 지적할 것입니다. 또한 세계적 관점에서  1937년 여름에 발발한 중일전쟁이 세계대전의 근원이라 주장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유동적입니다. 

1939년 당시 폴란드는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곳에 위치하고 있었고 두 개의 탐욕스럽고 파렴치한 전체주의 정권 사이에 끼어 있었습니다. 두 국가 모두가 폴란드를 파괴하려 했습니다. 폴란드는 1939년 독일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합리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습니다. 독일의 위협과 요구에 맞서 굳건히 버텼고, 1년 전 체코슬로바키아의 예시를 보며 히틀러를 달래려는 시도가 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대신 강력한 국제 동맹국을 확보해 히틀러의 공격을 저지시켰습니다.  

물론 약간의 실패도 있었습니다. 폴란드가 더 효과적으로 재무장하거나 더 많은 전력을 동원했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이미 폴란드 경제 수준으로 감당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실행되었으며 폴란드 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들도 기갑 부대의 우위를 예측하지 못한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따라서 폴란드가 무엇인가를 더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기는 다소 어렵고, 이러한 상황에서 폴란드를 비판하는 것은 피해자를 비난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폴란드는 합리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지만 그 위치가 불리했을 뿐입니다. 

폴란드는 여러 가지 이유로 나치 독일 정권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것은 독일이 원하던 영토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 중 일부인 포즈난 주변 지방 또는 이전 "서프로이센" 지방은 1918년 이전에는 독일에 속해 있었고 심지어 독일 소수 민족도 그 곳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폴란드는 독일이 미래의 "레벤스라움(Lebensraum )"또는 "생활권"으로 지정하고 차지하고 싶어했던 공간 중 일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인종으로 따졌을 때 슬라브인인 폴란드인은 나치 이론가들에 의해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리고 폴란드에는 유대인 인구가 많았기 때문에 인종적으로 혼합되어 철저히 ‘유대화’되었다고 간주되었습니다. 따라서 나치는 역사적, 영토적, 이념적, 인종적 원인들로 폴란드를 파괴하려 했습니다. 이런 종합적인 측면에서 폴란드의 운명은 아주 비극적이었습니다. 

이 모든 요소는 폴란드가 전쟁 중에 겪었던 매우 고통스러운 사건들(바르샤바 봉기, 홀로코스트, 1939년 바르샤바 전투)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결과적으로 다른 국가와 비교했을 때 근현대사가 폴란드들의 일상적 대화의 주제가 된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으며, 어떻게 보면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국가적 트라우마가 없었다면 이를 논의할 필요도 없었을 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폴란드의 경우에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각 국가는 "사용할 수 있는 역사", 즉 과거를 설명할 뿐만 아니라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서사가 필요합니다. 문제는 폴란드에서 근대사, 특히 20세기의 역사에 대한 정직한 논의가 1989년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시작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 논의는 여전히 진행 중이며 서사는 여전히 쓰여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뜨겁고 열정적인 어조로 역사가 논의되곤 하는 것입니다. 

윈스턴 처칠은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여진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은 어느 정도 옳았으며, 폴란드가 현재 직면하고 있는 딜레마를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전후 몇 년간 역사는 대부분 승자에 의해 쓰여졌습니다. 영국, 미국, 소련은 모두 자신들만의 전쟁사를 써내려 갔고, 서방 국가들은 세계의 좌파 지지자들로 인해 거의 비판 없이 소련의 이야기를 받아들였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폴란드의 전쟁 역사와 연합군의 승리에 대한 폴란드 군의 기여도를 정직하게 평가하려는 모든 시도는 사실상 묵살되었습니다. 망명 중인 폴란드인들 조차도 승리자들의 이야기를 뒤엎고 진실을 밝힐 수 없었습니다. 폴란드는 공산 정권이 승인한 범위 내에서만 전쟁에 관련된 이야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2차 세계 대전 이후 몇 세대가 지나가며 마침내 보다 정직하게 역사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새로운 세대는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역사를 써내려 가고 있습니다. 폴란드의 경우에는 그들의 역사에 대해 공개적으로 토론하고, 어떻게 새로운 내러티브가 등장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공산주의가 가하는 사상적 한계가 사라졌고, 종전 이후 많은 시간이 경과되면서 과거사를 멀리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이렇게 만들어집니다. 각 세대는 이전 세대가 구축한 내러티브를 어느 정도 수정합니다. 

어디까지 수정할 수 있을지는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과제입니다. 나는 많은 폴란드인들이 주로 앵글로색슨계에서 "나치"와 "독일"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경향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언젠가 전 세계가 “나치”에 의해 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고, 독일인이 그들의 첫 번째 희생자일 뿐이라고 분리하여 생각할 것이라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제2차 세계 대전과 홀로코스트에 대한 독일의 책임은 서구의 역사에 확실하게 내재되어 있습니다. 일부 폴란드인들은 “나치”라는 단어만 사용하는 것에 화를 내기도 합니다. 마치 나치가 모든 나쁜 짓을 저질렀고 독일인들은 결백한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가 이야기되는 방식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나치"라는 단어를 "독일인"의 동의어로 사용하는 것이 게으르게 느껴지긴 하지만, 아무도 나치가 독일인이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망각의 정치에 대해 말하자면, 저는 소련/러시아의 전쟁 서사와 현 푸틴 정권이 역사를 통제하여 전쟁을 호의적으로 비추고 소련 범죄를 흐리게 하려는 시도가 더 위중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마치 히틀러의 추종자들이 독일에서 여전히 권력을 잡고 히틀러를 위대한 정치가이자 연설가로 추앙하는 것과 같습니다. 

비교는 그로테스크하지만 소련이나 그 뒤를 이은 푸틴의 러시아가 모두 소련의 전쟁 역사에 정직하게 설명한 적은 없습니다. 러시아가 만들어내는 거짓과 진실을 은폐하려는 시도는 분열을 일으키기 위해 계산되었으며, 이는 소수의 서구 언론인과 학자들의 게으름보다 훨씬 더 해롭습니다. 역사적 진실을 옹호하려면 1939년 소련이 폴란드를 침공했다는 사실과 카틴 학살에 소련의 책임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확고한 입장을 보여야 합니다. 오히려 이것이 더 중요한 부분입니다.

지정학적 관점에서 폴란드는 현재 몇 세기 전보다 더 나은 상황에 있습니다. 그러나 주변국과의 관계는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습니다. 동쪽에는 과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공격적인 러시아가 있고 서쪽에는 과거를 완전히 잊고 싶어하는 EU 국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국립추모사업회의 역사교육프로젝트 일환으로 월간 Wszystko Co Najważniejsze (폴란드)에 게재된 것이다.


로저 무어하우스 - 현대 중부 유럽의 역사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영국 역사가이자 독일학자로,  특히 나치 독일과  홀로코스트 및 제2차세계대전에 중점을 두어 연구하고 있다. 그는 "First to Fight: Polish War 1939"의 저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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