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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로스와프 샤렉 폴란드 국가기억원 원장 ‘타협하지 않는 폴란드 정신’

11.11.2020

11월 11일 폴란드 독립기념일을 맞이하여 야로스와프 샤렉 폴란드 국가기억원 원장이 ‘타협하지 않는 폴란드 정신’에 대한 글을 섰다.

Jarosław Szarek

사진: Wszystko Co Najważniejsze 월간

저자: 야로스와프 샤렉. 역사학자, 국가기억원 원장.

합법적 국가를 박탈당한 폴란드는 19세기, 폴란드 문화와 과학, 경제를 재건하고 수 세대에 걸쳐 폴란드인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던 독립에 대한 열망을 새롭게 일깨우는데 모두 성공하였다.  

1918년 11월, 폴란드공화국의 재탄생을 알리는 라디오 전보가 워싱턴에서 도쿄까지 전세계 수 많은 도시로 퍼져나갔다. 방송은 폴란드정부는 앞으로 “140년 동안 운명처럼 폴란드를 지배했던 폭력의 역사를 몰아낼 것”이라는 내용이었는데 이는 18세기 말 오스트리아, 프러시아, 러시아 등 주변국의 일방적 모의로 사라진 후 폴란드가 독립된 공화국으로서 유럽 지도에 다시 등장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독립된 국가 부활을 알리는 라디오 전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상징이 되었는데 이유는 외세 침략을 상징하는 장소 부근에서 송출되었기 때문이었다. 외세 침략의 대표적 상징물이 바로 1830년대 11월 봉기가 실패한 후 러시아가 축성한 바르샤바성채인데 이곳에서 수 많은 폴란드인들이 불복종을 이유로 투옥되고 처형당했는데 이들 중엔 저 유명한 바르샤바 요새10별동에 수감되었던 최고 사령관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도 있었다.  

전환점이 된1918년은 „폴란드 독립과 주권 회복”은 이 후 폴란드인들이 독립국가 창설을 준비함과 동시에 조국을 지킬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폴란드인들은 이런 상황이 오기를 간절히 원했고 5세대(1795년부터 시작)에 걸쳐 독립국가를 실현하기 위한 조처를 밟아왔다.  

한 세기 동안 많은 이들이 조국 독립 재건을 위한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실천한 사람은 많지 않았으며 외부의 적뿐 아니라 승리를 확신하지 못하는 동료들과도 부딪쳐야 했다. 자신하지 못했던 자들은 독립을 외면하거나 반역을 꾀하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했다.  “finis Poloniae(폴란드의 종말)”란 말이 명확히 실현되었음이 증명된 암울한 상황, 외세의 억압 속에서 패배의 쓴맛을 삼켜야만 했던 시간은 얼마나 많았을까?  

1797년 초,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와 함께 만들어진 폴란드 부대에서 처음 전투를 벌였던 이탈리아 주둔 군인-이민자들 사이에서 희망에 찬 노래가 작곡되었다. 가사는 “폴란드는 우리가 살아가는 한, 결코 무너지지 않으리…”-어떠한 외적들이 우리를 침략해도, 우리는 손에 든 칼로 되찾으리…”로 전국적 봉기가 일어날 때마다 무장투쟁을 고취하는 역할을 하였다. 러시아를 상대로 한 가장 큰 봉기는 1830년 11월과 1863년 1월 사건이었는데 이때의 유혈 진압으로 수 천명이 시베리아로 유형을 가거나 재산을 몰수당했으며 수 많은 제도와 법이 폐지되었으며 강압적인 러시아화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폴란드 정신은 가족 안에서 이어졌다. 가정에선 어머니들이 기도하는 법을 가르쳤고 자랑스런 과거와 역사, 영웅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며 “오 쳉스트호바 신전을 지키는 거룩한 성녀시여 저 뾰족한 문 위에서 밝게 빛나시는 도다”, 야스나 구라 수도원, 빌니우스, 기에트슈바우트 성지로 순례를 인도하시며”라고 기도했다… 교회도 그 정신을 살려 나가는데 힘을 보탰다. 신부들은 항상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였고 학교를 세웠으며 먼 거리를 마다 않고 독립운동가들과 접촉했지만 마지막에는 시베리아로 유배를 가거나 교수형을 당했다.   

군사적 패배와 억압으로 인해 폴란드인들은 무력 활동 대신 경제와 과학, 교육분야에서 탈출구를 찾았고 그 결과, 다양한 분야에서 큰 업적을 이뤄냈는데 그러한 흔적은 과학 출판물과 지도 상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체르스키산, 도보스키산, 체르카노프스키산은 1월 봉기에 참여했다는 죄목으로 시베리아 유배를 당한 사람들을 기념해 명명했다. 또 다른 예는 칠레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이곳에선 거의 전 지역에서 이그나치 도메이코의 흔적을 접할 수 있다. 도메이코는 11월 봉기가 실패로 돌아간 후 강제로 폴란드를 떠나 칠레로 이주해 그곳에서 일생을 보냈다.  

이곳에서 망명한 독립투사들은 경제단체, 은행, 농업회사, 도서관, 과학협회 등을 설립했다. 각종 억압에도 불구하고 이런 움직임은 폴란드의 토지 소유권과 고유한 제도 관계망을 효과적으로 보전하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비록 개별 그룹들의 이해를 위한 활동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조국 수호에 많은 이들이 동참했다. 

이 후 세대들이 조국에서 살지 않았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폴란드인임을 잊지 않았고 조국을 위해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비록 독립을 박탈당했지만 기억과 문화는 지속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암울하고 엄혹한 시기에 오히려 훌륭한 작품들이 나오고 업적을 쌓게 되는데 아담 미츠키에비치, 율리우스 스워바츠키, 지그문트 크라신스키 같은 위대한 망명 낭만파 시인들의 작품이 이에 해당되었다. 외부로 몰래 반출되기도 하고 검열로 금지 도서가 되기도 했지만 이들의 작품은 폴란드인들의 마음속에 애국심을 지폈는데 폴란드가 낳은 위대한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프레데릭 쇼팽의 작품도 여기에 속했다. 그는 작품을 통해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면서 한편으로 독립에의 열망을 표현하였다. 그의 음악은 오늘날에도 세계인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최초 여성 노벨상 수상자이자 폴란드 여성으로는 첫 노벨상 수상자인 마리아 퀴리-스크워도프스카가 자신이 발견한 원소를”폴로늄”이라 명명하고 이를 원소주기율표에 넣어 역사적으로 “폴란드”를 기념했던 시절, 폴란드는 유럽 지도에서 찾을 수 없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05년, “쿼바디스”의 작가 헨릭 시엔키에비치에게 노벨문학상이 수여되었는데 당시 그는 세계적인 작가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노벨 수상 기념 행사 중 조국 폴란드에 대한 질문을 받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국이 망했다고 설교하지만 이 자리가 폴란드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1,000가지 증거 가운데 하나다, 조국이 정복당했다고 선포 하지만 이 자리가 승리하는 법을 알고 있다는 새로운 증거다.” 동시대 거의 모든 폴란드인은 그의 “Trilogy”을 읽으며 성장했다. 이 삼부작은 17세기 폴란드와 침략자 터키, 스웨덴, 코사크와 있었던 수 많은 전투를 서술하고 있다.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젊은이들은 피우수트스키 여단을 지원하거나 폴란드 이민자들로 구성된 미군 부대를 편성하였는데 전쟁 중에도 시엔키에비치의 책만은 배낭에 넣고 다녔다. 조부모들이 태어날 당시에는 나라가 존재하지 않았는데도 참전 젊은이들은 폴란드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쳐 싸웠다. 역사 화가들의 작품 또한 폴란드를 기억하고 기념하였다. 뛰어난 화가인 야첵 말체프스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림을 그리면 폴란드가 다시 일어설지도 모른다.” 그런 작품들 가운데 얀 마테이코의 작품 전시회가 그의 서거 1주년이 되는 해에 르비브에서 열렸는데 여기서 1794년 라츠와비츠카 전투 100주년을 기념하였다. 과거 미국 독립을 위해 싸웠던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 장군이 이끄는 부대는 농민군의 지원을 받아 러시아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러시아를 상대로 거든 이 전투화는 얀 스티카, 보이치에흐 코삭이 그린 것으로 길이만도 100미터가 넘는 기념비적 작품으로 특별히 원형으로 둘러볼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이 그림을 보기 위해 수 많은 폴란드인들이 단체로 수 백 킬로 떨어진 곳에서도 찾아온다. 관람자들의 입에선 이런 탄성이 나온다: “이건 그림이 아니다, 이건 실사다.” 산간 오지 출신이 대부분인 수 천 명의 청년들이 폴란드인으로서 합법적인 주권이 없는 나라, 하지만 문화와 전통이 풍성한 나라를 근대 국가로 만들기 위해 기울인 노력은 수치로 계산할 수 없는 값진 유산이다. 이들은 폴란드 문화를 지키는데 공헌했을 뿐 아니라 주변국으로서 조국을 러시아화, 독일화하려던 나라에서 조부모가 태어난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폴란드 정신을 심어주었다(폴란드는 이들을 “타협하지 않는 정신”의 폴란드인으로 바꿔 놓았다). 이 정신은 폴란드에 독립을 안겨준 1918년 11월 11일의 역사적 사실을 드높여 주었다.  

국립기념원 역사 교육 프로젝트 일환으로 월간 Wszystko Co Najważniejsze에 실린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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