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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자유에 대한 조항

03.05.2023

마테우시 모라비에츠키 총리 폴란드 공화국의 총리이다. 그는 폴란드 유럽연합 가입 조건에 대해 협상한 팀의 일원이었다. 브로츠와프 대학교에서 역사학 학위를 받았으며 브로츠와프 과학기술대학교와 센트럴 코네디컷 주립대학교에서는 경영학 학위를 받았다.

Premier Mateusz Morawiecki

폴란드 자유에 대한 조항

 

역사는 잔인한 아이러니의 영역입니다.

폴란드 제1공화국에서 공화주의 이념이 완전히 자리 잡기도 전에 붕괴가 일어났고, 우리의 조국은 세계지도에서 사라졌습니다.

1791년 5월 3일 정부법은 우리가 헌법 전문에서 읽었듯이 '우리 자신을 회복시킨 죽어가던 순간'에 비준되었습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분단으로 인한 격동의 시기에 그들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에 직면했습니다. 그들이 남긴 대답은 약 230년의 시간 동안 여전히 의미가 있었으며 그 답은 21세기인 지금도 여전히 우리를 정의해 줍니다.

우리는 서부의 동쪽도 아니고 동부의 서쪽도 아닙니다. 폴란드는 유럽의 심장입니다. 우리는 프랑스 철학자들의 상상 속 동유럽도 아니며, 독일 수상들의 상상 속 중유럽도 아닙니다. 우리는 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우리 고유의 정체성을 진화시켜왔습니다. 조국의 아버지라고 불리기도 하는 5·3헌법의 저자들은 계몽주의의 원래 정치사상과 수백 년간 우리의 정치 문화에 굳건히 뿌리내려온 전통을 병합했을 때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민주주의는 자유시민들의 체제이고, 폴란드에서의 민주주의 역사는 15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영국에 대헌장 (1215)과 인신보호법 (1679)이 있었던 것처럼, 폴란드에는 네미넴 캡티바비무스 법 (1433)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법률들은 당시 어느 곳에서도 들어보지 못했던 자유를 부여했습니다. 폴란드는 '젊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 현대 유럽의 가장 오래된 민주주의 국가 중 하나입니다. 폴란드 제1공화국은 고대 로마에서 탄생한 공화주의 전통을 되살렸습니다.

1791년 5월 3일, 폴란드는 유럽 입헌주의의 요람이 되었습니다. 18세기 말에는 절대주의의 바다에 둘러싸인 자유의 섬이었습니다. 이데올로기의 거센 파도는 피비린내 나는 피해를 입혔던 20세기 전체주의로 절정에 달했지만 우리의 정치 문화는 항상 전체주의와 절대주의에서 멀어져 왔습니다.

우리가 폴란드의 세례로 국가가 되었다면, 1791년 5월 3일에는 현대적인 의미에서 하나의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날 채택된 헌법은 법령과 역사적 자료로서는 물론이며 법률, 자유, 기독교 이 세가지 기초에 근거해 우리 정체성을 이룹니다. 그리고 우리가 당장 오늘과 내일의 삶에서 지키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가치들입니다.

5월 3일의 헌법은 이후의 독립 운동뿐만 아니라 연대 운동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폴란드인은 무엇보다도 자유로운 인간입니다. 선조들이 그들의 자유를 잃었었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겐 내재된 자유가 있습니다. 분할 이후 조국에 '철의 장막'의 그림자가 내렸을 때도 이러한 사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폴란드인이자 유럽인으로서, 호모 소비에티쿠스 정체성이 압도적 다수의 폴란드인들에게는 항상 낯설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폴란드 역사에서 1791년은 조국에서만 적용되는 '법률 혁명'이 시작된 기적의 해였습니다. 피비린내 나는 정치 쿠데타, 내전, 시해가 아닌 폴란드 국회가 가져온 혁명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생각해도 됩니다. 그것은 단지 먼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며 우리가 끝까지 지켜야 할 도덕적 의무이기도 합니다.

5·3헌법은 국가와 법의 기반을 다지는 동시에 개인의 자유도 보장했습니다. 그리고 제1공화국의 마지막 세기에는 리베룸 베토가 상징했던 자유, 무법 상태, 그리고 무정부 상태를 명확히 구분하기도 했습니다. 강력한 국가만이 시민들의 자유를 보장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 나라에 대한 책임이 없는 곳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5월 3일 정부법은 공권력을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로 나누었습니다. 샤를 몽테스키외와 존 로크에 의해 상정된 삼권분립의 개념은 헌법 저자들에 의해 "인간 사회의 모든 권위는 국민의 의지에 의해 기원한다"는 국가 주권의 원칙으로 보완되었습니다. 국가에 봉사하지 않는 권위는 정당성을 잃습니다. 이것은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에 모두 적용됩니다. 역사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5·3헌법은 농노제를 폐지하지는 않았으나 인민 해방의 길을 열었습니다. 기사 중 하나는 농부를 "농노"가 아닌 "농민"으로 언급했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이든 "폴란드 땅에 발을 디디자마자 원하는 곳에서 자신의 산업을 완전히 자유롭게 행할 수 있도록 하라"고 보장했으며 이는 우리 역사의 전환점이었습니다. 그때까지 국가는 귀족과 동의어였습니다. 18세기 말 폴란드의 정체성이 재정의된 것입니다. 폴란드를 사랑하고 폴란드에서 자신의 삶을 이어나갈 준비가 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회적 또는 민족적 배경에 관계없이 폴란드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폴란드의 애국심이 제3제국에서 가장 흉포한 모습을 보인 독일의 민족주의와는 다른 이유입니다.

더욱이 5·3헌법은 제1공화국 시민들이 향유했던 종교의 자유를 보장했습니다. 16세기 말까지 폴란드는 유럽에서 종교의 자유의 안식처였습니다. 민주주의는 인간이 개체가 아닌 시민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제도이기에 소중한 것입니다. 인간 존엄성과 자유는 우리 문명의 기독교적 근간에서 기원한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복음이 우리에게 준 가치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민주주의', '헌법' 같은 말은 의미를 잃은 채 거짓 옹호자들의 공허한 슬로건이 될 뿐입니다. 이는 폴란드 건국의 아버지들이 우리에게 남긴 교훈이기도 합니다.

헌법이 채택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 역사는 지속되지 못했고 폴란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영광스러운 5월 3일 혁명 전날 바르샤바 전역에 울려 퍼진 격언 중 하나는 “고결함이 나라의 행복이라면 온 국민에게 작위를 내려라.”였습니다. 이 말은 19세기와 20세기에 전 사회가 투쟁해야 했던 보통선거권이라는 대담한 꿈을 표현한 것입니다. 폴란드는 자유의 선봉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서양에서 커지고 있던 절대주의 세력이 폴란드 자유의 꿈을 순식간에 산산조각 내버렸습니다.

작년 2월 24일은 자유란 완전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인 토마스 제퍼슨이 했던 말처럼 “자유의 대가는 영원한 경계”입니다. 조국의 동쪽 국경 너머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은 우리의 자유뿐만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에 관한 것입니다. 즉 우리가 200년 300년을 넘어 천년 뒤에도 폴란드인일 것인지에 대한 것입니다.

5·3헌법의 운명은 우리에게 또 다른 교훈을 줍니다. 초국가적 연방이 아닌 민족국가만이 신뢰할 수 있는 보증인으로서 시민들의 자유를 보장해 줍니다. 폴란드가 지도에서 사라졌을 때 우리는 자유를 잃었고 독립하기 전까지 이를 되찾지 못했습니다. 유럽을 이루고 있는 국가가 없다면 유럽은 어떻게 됐을까요? 유럽은 민족이 승리했을 때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유럽 연합은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고 단합하는 민족 국가들의 공동체로서, 러시아의 제국주의와 그 '붉은 차르'에 맞서기 위한 정치적 도덕적 힘을 유지할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더 많은 도전들이 남아있습니다. 세계적인 힘의 균형이 우리의 눈앞에서 바뀔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격동의 시대에 우리는 미래를 신중하고 책임감 있게 설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5·3헌법의 유산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마테우시 모라비에츠키

 

 

폴란드 국립기념연구소와 폴란드 국립재단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역사적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폴란드 월간 “Wszystko co Najważniejsze”와 협력하여 출판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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